사방에 하얀 눈 내리던 로키 산맥 한 자락에서도. 맥주를 양손에 들고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던 퀘벡의 페스티벌에서도. 비 잔뜩 맞으며 자전거 탔던 스탠리 공원에서도. 어느 한 곳도 당신과 함께였던 적이 없었지. 하지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나는 당신을 떠올렸고, 그렇게 우린 함께였어. 방목된 나의 울타리는 당신이니까.
사실 당신 떠올리는 시간을 따로 두지는 않아. 여기저기서 스며들어오는 모든 것의 냄새가 나에게 당신을 안겨주니까. 냄새뿐만이 아니야. 우리 함께 했던 공간의 공기, 열기, 물방울들. 아니, 땀방울들. 이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온 몸에, 온 마음에 가득 새겨지는데, 그래서 난 늘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워.
아무래도 이건 편지이니까, 내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도 적어볼게. 형식적인 것 같지만 당신, 나는 형식적일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지? 요즘 난 정신이상자 같아. (그래도 당신은 날 떠나지 않을 거지?) 어제는 집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내 얼굴을 마주했어. 그리고 난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을 보았어.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더라. 양쪽 입꼬리가 올라간 그 표정에 소름이 끼치더라. 그래서 어제는 한숨도 못 잤어. 게다가 엊그제는 한바탕 울어버렸어. 올해 가장 많이 울어버린 날일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난 참 잘 울어버리잖아. 사실 당신만 아는 사실은 아니야. 중학교 때부터 반 친구들은 국어 시간마다 나를 곁눈질 하고는 했어. 섬세하고 부드러운 시나 문장을 읽으며 울어버리곤 했거든. 난 아이들의 그 눈빛에서 분명 들었어.
“이쯤이면 꽃잎이가 울겠군.”
그때부터 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나는 언제든 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엊그제 난 절대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언제든 울음을 그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더라. 안산에 갔어.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수많은 얼굴들이 보이는데, 차마 들어가지 못하겠더라. 그때부터 울어버렸어. 손을 얼마나 꽉 쥐었던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더라. 하얀 국화를 건네받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지. 뒷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떨며 눈을 들었어. (아. 글로 울어버린다는 것은 어떤 걸까. 방법이 있다면 난 글로 울고 싶다. 내 글에서 계속 눈물이 나와서 아무것도 쓸 수 없는 그 느낌. 쓸 수 없다는 느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쉴 새 없이 울었고, 예빈이 어머니께서 나를 안아 주셨어.
“괜찮아. 괜찮아.”
이것 보라고. 나는 절대 배우가 될 수 없어. 괜찮다고, 함께 하겠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란 말이야. 그런데 오히려 위로는 그들의 몫이 되었어. 그리고는 나를 꼭 껴안고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손수건을 건네셨어. 노란 리본이 수놓아진 작은 손수건. 함께 울어주어 고맙다고 하시더라. 정말 미친 듯이 울었고, 난 내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미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은 원래 이런 걸까.
그래서 엊그제는 당신보다 분향소에서 마주한 그들 생각을 더 많이 했어. 하지만 맹세해. 난 당신과 키스하던 그 순간부터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내 방 구석에 놓인 저 손난로에도 나의 사랑을 맹세할 수 있어.
우리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에게 더 실망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사이좋게 지내자.
2015년 동짓날,
정신이상자, 그러니까 꽃 잎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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