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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박머시






“엄마 좀 가만히 있으라니까? 아. 노인네 또 아프다고 할 거면서 왜 자꾸 몸을 움직여?”


우리 둘째 아들입니다. 나를 닮아 사소한 것으로도 역정을 냅니다. 우리는 걱정이라는 마음을 너무 아픈 말로 포장합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요. 이 늙은이를 걱정해주는 예쁜 아들입니다. 짐승들 먹이 주러 밖에 나가려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텔레비전을 틀었어요. 뉴스가 나오네요. 일본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또 괘씸한 소리를 했나봅니다. 위안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괜히 화가 나서 텔레비전을 휙-하고 끕니다. 그리곤 손주가 쓰던 책상에 앉았어요. 숙제를 해야 하거든요. 책을 폅니다. 책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국민핵교 국어책입니다. 사실 나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을 의심하게 됩니다. 저 할배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지. 저 할매가 나 글 못 읽는다며 등쳐먹지는 않을지. 글을 읽거나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괜히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승질을 냅니다. 다들 그저 성격 더러운 노인네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렇게 곯고 곯은 내 고민을 알아챈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둘째 며늘아기입니다. 대뜸 어머니 글 배워보시는 것이 어떻겠냐며 매일같이 학교에 데려다 줍니다. 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늘 내 공부를 봐줍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머리에 안 들어와. 다 늙어서 공부한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야. 성경책을 읽기는커녕 우리 손자한테 편지 하나 못써보고 죽겠네. 학교에서 받아쓰기해도 매일 내가 꼴찌야. 나만큼 틀리는 사람도 없어.” 


결국 오늘도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쓰고 읽어도 금세 까먹어 스스로에게 심통이 난 겁니다. 며늘아기 앞에서 우는 것이 창피시러워 화장실로 달려왔습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눈이 발간 소녀가 있더군요. 아마 저건 나인가봅니다. 글공부를 할 때면 난 항상 아이가 되니까요. 며늘아기는 마음 급하게 잡수시지 마시고 천천히 같이 하자며 내 손을 꼭 잡아줍니다. 손만 쭈글쭈글해진 아이를 잘 다그쳐줍니다. 그래서 난 연필을 놓지 못합니다.  


“어머니, 아가씨들이랑 큰아주버님 이름 예쁘게 써보는 것 어때요? 그럼 제가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서 보낼게요. 다들 좋아하실 거예요!”

며늘아기가 옆에서 우리 애들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소리 내어 읽어 줍니다.

“배.성.원., 배.순.녀., 배.순.자., 배.문.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습니다. 

‘배성원’

‘배순녀’

‘배순자’

‘배문자’


공책에 꾹꾹 눌러쓴 이름 위에는 수북히 쌓인 지우개똥이 있습니다. 며늘아기는 너무 잘 쓰셨다고 박수를 두 번 칩니다. 그리곤 저녁준비 한다며 부엌으로 갔습니다. 쌀 씻는 소리가 들리네요. 나는 며늘아기 몰래 둘째 아들과 며늘아기 이름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혼자 소리 내고, 적으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ㅂ,,배..용ㅇ..용.용..하..” 

둘째 아들 이름은 우편물이 올 때마다 많이 보아서 생각보다 쉽게 적을 수 있습니다. 

‘배용하’

그리고 우리 예쁜 며늘아기의 이름을 소리 냅니다.

“ㅂ,.ㅏ,..,ㄱ,,,박..민..민...서...” 

며늘아기 이름은 아무리 봐도 낯섭니다. 항상 ‘꽃잎애미’나 ‘꽃잎아’라고 부릅니다. 아, 꽃잎이는 우리 첫째 손녀딸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만큼이나 낯선 것이 며늘아기 이름입니다. 공책에서 제일 깨끗한 맨 끝장에 몇 번이고 지우고 썼습니다. 아주 반듯한 글씨로 썼습니다.


“어머니, 식사하세요!”

마침 저녁준비가 다 되었나봅니다. 저녁 다 먹고 며늘아기에게 보여주어야겠습니다. 아마 아주 잘 썼다고 하겠지요.




‘박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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